2024. 5. 12. 21:42ㆍ기록
얼마 전에 맨스티어와 ph-1 간의 디스전을 보고 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는 쇼미더머니 3를 보고 힙합의 팬이 되었다. 목을 거칠게 긁어대며 랩을 하던 바비는 아주 멋있었고 내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로 힙합을 즐겨듣고 가사를 외우고 랩을 따라부르고 쇼미더머니를 즐겨봤다. 가리온, 벅와일즈, 두메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스트뮤직과 일리네어 레코즈, 하이라이트 레코즈 등 지금은 거의 없어진 이름들은 내가 힙합을 듣던 시기에 큰 산맥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되게 멋지게 느껴졌고 '이게 힙합이구나...' 싶었고 이들이 언제까지고 활동할 거라 생각했다. 이런 노래들이 계속해서 주류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듣는 거야 말로 멋진 힙합이었고, 때 지난 노래들은 다시 듣기에 가사도 멜로디도 라임도 너무 구렸다. 그 때는 몽환의 숲을 좋아하던 형들을 보며 '이런 구린 걸 왜 듣고 왜 따라부르는 거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26살이 된 지금 나는 지금의 힙합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 팝적이 요소가 강하거나 싱잉이 주를 이루는 노래들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요새도 그 때의 힙합을 듣는다. 지금의 아이들이 나를 본다면 '저딴 구린 걸 왜 듣는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힙합은 계속해서 변해왔지만, 그럼에도 잘 변하지 않는 건 힙합의 외골수 기질이다. 힙합은 본인들의 아이덴티티가 강하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쇼미더머니3를 보면 아이돌인 바비와 비아이를 보며 '아이돌이 무슨 랩이야?'라고 욕하고 바스코를 향해 '이건 락이지. 어떻게 힙합이냐?'라고 욕했다. 산이와 릴보이는 래퍼면서 발라드 랩을 했다고 욕 먹고 조리돌림을 당했고 예능에 나간 래퍼들도 욕 먹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장르에 비해 배척이 심한데 이건 어느 정도 힙합이라는 문화의 일부라고 본다. 힙합의 자아에 '내가 최고야! 너네 나한테 안 돼!'라는 게 있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런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게 그러하듯 힙합은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돌이었던 바비가 쇼미더머니3에서 우승을 했고 싱잉랩은 힙합의 한 주류로 자리 잡았으며 이젠 대부분의 래퍼들이 예능에 나간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했던 쇼미더머니는 힙합의 등용문이 되었다가 음원과 자극만 노리는 망한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이 또한 유구하게 자리를 지키기보다 유연하게 흘러가는 힙합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현재 국내 힙합씬에서 가장 뜨거운 사건이 맨스티어 vs ph-1 디스전이다. 대구힙합페스티벌에서 ph-1이 먼저 맨스티어의 디스를 암시하는 듯한 멘트를 했고 맨스티어가 바로 이에 맞대응을 했으며 이후 서로 디스곡을 주고 받은 상황이다. 힙합 팬으로서 이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국힙의 현주소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서 안타까웠다. 조롱이 됐든 개그가 됐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옹호하는 건 그게 어느 정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가지 않으려 발악하는 래퍼들이 있고 돈, 여자, 차 얘기가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래퍼들이 있고 마약이나 음주운전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래퍼들도 있다.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로 일반화하여 말하면 안 되는 건 당연하지만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이에 대해 당당하게 화낼 수 있는 래퍼가 몇 없다. 개인적으로 뷰티풀너드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개그였으니 굳이 대응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ph-1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맞대응에 의해 랩게임이 되었으나 이에 참여할 수 있는 래퍼가 없는 것이다.
힙합을 개그소재로 삼았던 것들 중에 이렇게까지 뜨거워진 적은 없지만 힙합은 유연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런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적절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념과 멋은 다르다. 힙합씬에서 '내가 최고야!'라고 외치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너넨 틀렸어!'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신념과 그 신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행보가 필요하다. 당연히 실력과 신념이 뒷받침이 되어 있다면 그 래퍼는 환호 받겠지만 그 신념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을 때는 그 이상의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신념을 떠나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람이 떳떳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이런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사람은 당당할 수가 없고 힙합에서 이런 당당함이 없으면 절대 멋있을 수가 없다. 지금의 힙합씬에는 실력도 신념도 멋도 없다. 내가 봤던 힙합은 래퍼와 마이크만으로 무대를 빛내고 관중들을 뜨겁게 했었는데 어느새부터 힙합은 멋있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