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아

2024. 1. 19. 01:45기록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댔었다. 집에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지갑에는 현금이 있어야 한다던 당신의 말씀대로 아빠의 지갑은 항상 두툼했었다. 아빠는 귀가 후 씻으러 갈 때 지갑을 항상 소파 위에 올려뒀었는데, 그 틈을 타 나는 지갑을 열어보고 지폐가 많으면 돈을 꺼내갔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번 초록색 지폐를 가져갔지만 어느샌가 일주일에 한두번씩, 가끔은 노란색도 꺼내갔다. 처음엔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던 행위가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 즈음엔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돈을 사용했다.

 

술담배를 하지 않고 집에서 꼬박꼬박 밥을 챙겨주던 그 나이부터 나는 사치를 알았다. 한 팩에 천 원 씩 하던 유희왕 카드를 한 상자로 산다. 그럼 삼만원 남짓 했던 거 같은데 그 많은 카드를 전부 가져가지도 않았다. 카드가 너무 많으면 내 은밀한 비밀이 부모님께 탄로날 수 있기에. 팩 안의 희귀한 카드는 다른 카드들과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문방구 사장님께 부탁드려 걔들만 따로 뺀 뒤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문방구에 기증했다. 테일즈런너 게임에도 돈을 썼는데, 내 캐릭터는 천사, 악마 아이템으로 풀 세팅이었다. 완전범죄를 위해 문화상품권은 창문 밖으로 버렸었는데, 한 번은 상품권을 버렸다가 인터넷 오류가 생겨 부랴부랴 집 앞으로 뛰어갔었다. 상품권은 찾지 못했고 엉엉 울면서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돈을 빼겠다고 생각했었다. 반성 따윈 없었다.

 

그 외에도 점심시간에 피씨방 가서 친구들에게 뽀글이 사주기, 하교하고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주기도 했다. 와중에 700원짜리 컵라면 말고 1500원짜리 뽀글이를 사주고, 크런치킹, 거북알, 아이스가이피치 같은 비싼 아이스크림을 골라주며 친구들에게 고급 음식을 베푸는 스스로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길에서 동생을 만나면 어깨를 잔뜩 펴고 용돈을 주기도 했는데 어렸던 동생은 그 돈이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르고 좋아했다. 어느날 아빠는 매번 줄어드는 지갑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껴 정확한 액수를 세어두고 샤워를 하러 갔다. 그 즈음 일주일에 네다섯번 돈을 훔쳐가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곧바로 아빠한테 걸렸고 아빠는 내게 크게 실망했다. 다행히 이 날 이후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신뢰를 회복했고 이제는 부모님과 웃으면서 '그 땐 그랬지'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진짜 미친 아이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미친 아이에서 생각이 없는 아이 정도로 스스로를 격상시켰는데, 남의 돈을 훔치진 않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으니 미친 건 아니지만, 남들은 열심히 취직 준비할 때 나는 부모님께 용돈 받으며 공부는 안 하고 술이나 쳐먹고 다니니 생각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생각이 없는 와중에 든 확실한 생각은 돈을 쓰는 것은 즐겁다는 것이다. 사치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내 손으로 직접 일군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해준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뭐라도 된 거 같게 만들어준다.  조금만 먹을 수 있고, 싼 걸 입을 수 있고, 게임을 좀 더 천천히 할 수 있고, 술자리를 적당히 나갈 수 있지만 돈을 쓸 때의 쾌감에 홀려 사치를 부린다.

 

'탕아'는 '방탕할 탕'에 '아이 아'를 쓴다. 26살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방탕한 어린이다. 열심히 공부하겠다 말하고는 놀기만 하는 지금의 나는 아빠 몰래 돈을 빼 가 친구들에게 으스대던 초등학생에서 몸만 자란 거 같기도 하다. 벌이가 생활에 맞춰지든 생활이 벌이에 맞춰지든 언젠가는 온전히 내가 내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렇다고 그 때의 내가 어른이 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성인이 되면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온전히 책임지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나는 무조건 자기계발 열심히 하면서 살 수 있어.'라고 확신했다. 6년이 지나 돌아보니 자기계발은 개뿔, 한 달이 끝날 때 통장에 돈이 남는 꼴을 못봤다. 이제 탕아는 집에 돌아가 회개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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