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8. 23:05ㆍ기록
어제 소개팅을 다녀왔다.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매우 앳되 보이는 얼굴로 출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되게 멋있었고 대단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운이 좋았다며 본인은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그녀를 칭찬하고 경탄해했던 건 당신이 열심히 산 거여야 내가 덜 한심해 보일 거라는 방어기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탕아'라는 글을 쓰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모님의 돈을 축내기만 하는 나를 돌아본지 한 달이 지나가지만 탕아는 아직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전에 비해 세줄일기를 쓰는 빈도가 매우 줄었다. 세줄일기는 생각하는 시간의 척도이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매우 줄었다는 얘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많아야 생각을 한다. 하지만 노래를 듣거나 핸드폰을 보며 걷는 게 일상이 되었고 하루 평균 유튜브 시청 시간은 3시간이 되어 간다. 또 잠을 푹 자야 생각이 풍부해지는데 자기 직전까지 도파민을 찾으니 항상 피곤하여 생각이 힘들다. 5.18 민주화공원에서 그들이 울부짖었던 자유가 진정 우리가 누리는 자유일지 고민하고,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을 보며 우리가 마스크를 벗기 위해서는 하늘의 마스크를 먼저 벗겨줘야 한다던 소년은 이제 없다.
이전에는 반성이 있었다. 지난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양심이 있었고, 내일은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다짐이 있었다. 그 다짐은 다음에도 지켜지지 못했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또 다른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그 믿음의 기저에는 열심히 공부한 뒤 얻은 성적이 있었지만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큰 의미가 없어지며 내가 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클라이밍과 지출 뿐이게 되었다. 클라이밍 실력이 성장한 것을 확인하고 직장인 형 누나들과 함께한 시간은 매우 즐거웠지만 그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제일 최악인 것은 공부를 안 한다. 수업에 온전히 집중하여 몰두하던 시간은 즐거웠고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스스로는 매우 자랑스러웠다. 높은 성적은 나를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였고 시험 기간은 지옥 같긴 했어도 제일 열심히 살았던 시간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도피성으로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것도 있지만 나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스스로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새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줄었으며 책을 펴고 책상에 앉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내가 차라리 불안하고 초조했으면 하지만 무뎌질대로 무뎌진 지금, 나는 너무 태연하다.
어떤 것에 무뎌진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항상 다짐을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다던 내게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거라고 말해주셨다. 그 때는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잘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속으로 '아니에요.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대단한 일인 거에요.'라고 말했다. 빌어먹게도 특별한 적이 없었던 나는 평범하지도 못한 아주 못난 사람이 되어서야 그 때의 내가 오만방자했지만 꽤나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물 안 개구리는 으스대며 우물 밖을 나섰지만, 우물 밖에는 특별하고 대단한 개구리들이 많았다. 못난 개구리는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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