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6. 01:33ㆍ독후감
'밝은 밤'을 읽고
신경숙 작가님의 '어머니를 부탁해'를 읽고 며칠 뒤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운 기억이 있다. 물론 술에 취한 상태여서 엄마한테 혼줄이 났지만 혼자서 5남매를 키워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 시골집에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과거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면 마음 깊숙이에서부터 답답함이 차오른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도 한 번씩 깊은 숨을 필요로 했고 눈물을 참으려 한참 고개를 들었다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책을 읽었다. 지연이 남편과 이혼하며 겪은 상처가, 희령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나 증조모, 새비 아주머니, 희자,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새 살이 돋는 과정 속에 여러 배울 점이 담겨있었다.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
증조모는 백정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차별받으며 살았다. 사람들의 악의가 익숙해져 이유 없는 친절을 겁내던 증조모는 일본 군인들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증조부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 아픈 어머니와 함께 갈 수 없어 끝까지 망설였고 자신에게 어미를 버린 딸이라는 죄책감을 지니게 한다. 처음 자신의 손을 잡고 개성으로 향했던 남편이 출가 후의 삶에 힘이 들어 점점 변해감에도 남편에게 고마워하며 산다. 개성에서 친절하던 이웃들이 백정의 딸임을 알게 된 후 교류를 끊고 다시 이유 없는 악의가 다가올 때도, 깨진 그릇을 밟아 양말이 피에 젖어 축축하지만 괜찮냐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하고 다시 보리밥을 내어와야 했을 때도 증조모는 체념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증조모에게 새비 아주머니는 어떤 의미였을까. 삼천아, 삼천아 하며 자신을 부르고 처음으로 사람의 온정을 느끼게 해준 새비가 증조모에게 얼마나 소중했을지, 고마웠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런 새비와 희자를 오래 숨겨주지 못하고 피난길에 오르게 해야했을 때 느꼈을 미안함, 대구에서 다시 살아있는 새비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 희령에 찾아온 새비를 위해 통장을 깨서라도 이런저런 먹을 것을 사 쥐어주는 마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마음이겠지만 나도 평생을 살면서 이런 친구 한 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비 아저씨와 다른 남자들
새비 아저씨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여성을 스스로와 동등하게 존중해준 남성이다. 증조부는 증조모를 사랑했다기보다 증조모의 구원자 역할에 심취한 듯했다. 개성에 와 힘든 삶이 시작되고 증조모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믿음에도 은연 중에 아내를 무시했다.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피난길에도 가장 따뜻하고 좋은 자리에는 자신이 누워야했던 그는 길남선이 아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딸과 중혼하는 것을 허락한다. 영옥을 속이고 결혼한 남선은 자신의 어머니와 또 다른 아내가 찾아왔을 때 죄책감 없이 어쩔 수 없었다며 북쪽으로 떠나버린다. 둘 사이의 아이가 남자가 아니었기에 영옥은 미선을 키울 수 있었지만 여자 혼자서는 호적에 자녀를 둘 수 없었기에 미선은 영옥에게 평생 법적으로는 남이었다. 미선의 남편이자 지연의 아버지인 사람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남편에게 바람 맞아 이혼한 딸의 아픔을 위로하기보다 딸이 이혼한 사실이 부끄럽기만한 사람인 걸 보아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런 일들을 시대상에 원인을 두기에는 새비 아저씨가 있다. 새비 아저씨와 나머지의 차이는 살았던 시대나,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믿음이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가난했는지가 아니다. 그저 새비 아저씨 깊숙히 자리한 타인에 대한 존중이 새비 아주머니를 한 명의 여자인 사람으로서, 영옥이와 희자를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있을 수 있게 했다.
상처와 상처
상처는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지기 쉽다. 내 상처가 버거워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힐 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내 상처를 돌보는 시간이나 상처 그 자체가 다른 이에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 아버지와 남선으로부터 받은 영옥의 상처는 희자와 미선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미선의 상처는 어릴 적 지연의 언니가 죽으며 더욱 커졌고 이는 결국 지연에게까지 상처로 이어진다. 이 상처들은 본인의 잘못으로 말미암지 않았기에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가족으로 인한 상처이기에 더욱 아프다. 쟤는 나한테 그럴 수 있고 얘도 나한테 그럴 수 있어도 가족만은 나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내 잘못도 아닌데 혼자 다 감당하는 것도 어렵고 상처 자체도 시린데 이를 곱게 봐주지 않는 사회도 서럽다. 이런 상황에 타인까지 생각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유감스럽게도 '밝은 밤'에서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지 않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의 핵심은 이 상처들이 어떻게 치유되는지이다. 보통 큰 상처를 입어 자기 스스로 회복하기 어렵다면 주변 사람이 도와주거나 상처 입힌 사람으로서 보상을 받겠지만 '밝은 밤'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모순적이게도 이들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끌어안는 법을 배운다. 삼천은 새비로부터 사람의 따뜻함을 채웠고 새비는 희자를 낳았을 때, 남편을 잃었을 때 영옥으로부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받은 상처받았지만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 받는다. 엄마에게 상처 받은 지연은 다시 엄마에게 상처를 주지만, 영옥은 덮어뒀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서야 그 상처를 마주하고 치료할 용기를 갖는다. '밝은 밤'에서는 이렇게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품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내 상처가 언젠가는 나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흉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직 나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아본 적은 없기에, 언젠가의 나에게 혹은 혼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얻은 이에게 이 책이 희령이 되어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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