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2023. 8. 20. 22:42독후감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호버카'나 '더스트'라는 단어를 보고 공상과학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자주 읽지 않는 장르라서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빌린 책이라서 좀 더 의지를 붙잡고 읽었다. 초반의 나오미와 아마라의 이야기가 상당히 묵직해서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금방 아영의 연구소에서 산딸기를 먹는 장면이 등장해 다행히 1/3까지는 멈추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책이었고 길게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 띄엄띄엄 읽었지만 몰입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꽤나 재밌었다. 더스트 시대 이후의 세대인 아영이 모스바나를 조사하며 만난 나오미에게서 프림 빌리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책의 전체적인 분배나 각각의 시간선의 배치가 매우 자연스러운 점도 좋았다. 

 

아래는 책을 읽고서 느낀 몇 가지이다.

 

모순

모순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이 반대되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식물을 연구하는 아영은 과학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미신을 믿는다. 결국에는 미신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서 모스바나에 관련된 실마리를 찾게 된다. 레이첼은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몸의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식물은 세계를 파괴한 과학 기술에 반대되는 상징물로 등장하는데 이를 연구하는 레이첼은 산업화 이후 과학 기술을 대표하는 기계 몸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수는 마을 사람들과 나오미에게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겠지만 레이첼에게 있어서는 범죄자이다. 지수가 레이첼을 속인 건 기만을 넘어서 범죄라고 생각한다. 레이첼이 기계 몸일지라도 인간으로 묘사되는 이상 지수는 동의 없이 환자의 뇌를 조작한 의사와 같다. 하지만 이런 지수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희수로서 어린 아영과 만났을 때도 좋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물론 레이첼에게도 좋은 사람이었겠지만 용납되지 않을 행위를 한 건 맞다.

 

기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지수가 레이첼을 속인 행위에 대해서 꽤나 오래도록 생각했다.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과 그 끝의 세계, 그 곳에서 세상을 구해낸 레이첼과 모스바나, 프림 빌리지에서의 공동체 생활 등 이 책이 제시하는 얘기는 많지만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머리 속에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하나였다. '나의 기만 행위를 상대방이 모를 때, 그리고 그 기만 행위를 상대방이 알게 되면 몹시 괴로워할 게 분명할 때, 상대에게 기만에 대한 사실을 밝히는 게 맞나?' 이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게 맞다.'였다. 지수가 레이첼의 동의 없이 안정화 장치를 활성화한 건 분명한 기만 행위이고 범죄다. 레이첼의 변화가 긍정적일지라도 빠르게 사실을 밝히고 레이첼의 의사대로 후조치를 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수가 레이첼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 계기와 시점은 너무나도 비겁했다. 자신의 행동이 그 자체로도 잘못됐음을 깨닫고 사과한 게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인해 레이첼의 식물들이 프림 빌리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그녀는 끝까지 레이첼의 정비사이자 친구이기보다는 공동체의 리더였고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책을 읽는 데에는 막힘이 없었고 분명 재밌었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주는 충격 만큼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전에 김초엽 작가님이 쓰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을 때는 2차원에서 3차원을 엿본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소재들로 가득했고, 그 소재들은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 가능한 우리의 삶에 밀접한 주제를 담아냈다. '지구 끝의 온실'은 확실히 신선한 주제와 신선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이나 생각에서 큰 여운이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이 던지는 메세지는 확실하고 충분히 생각해봄직하며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통해 만들어낸 세계와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쓰지 않아도'를 읽고  (0) 2024.01.14
'밝은 밤'을 읽고  (0) 202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