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대하여

2023. 4. 16. 21:48기록

 기억에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은 일기이다. 줄이 아니라 칸으로 된 일기장에 그 날 하루에 있던 일을 모두 나열했었다. 그 날의 날씨는 어땠는지, 밥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을 적었다. 줄로 된 일기장에 일기를 쓰기 시작할 즈음에는 사실들을 나열하기보다 나의 생각이나 느낀 점이 더 중요하다고 배웠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지만 군대에서는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 모든 날에 일기를 썼다. 그 글들은 부대 내의 부조리를 없애겠다는 나의 다짐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지 못하는 일들을 스스로 정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역 후에 다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읽게 된다면 분명 그 때가 떠오를 것이다.

 

 그 외의 기록으로는 수업 시간에 책에 중요한 내용들을 적거나, 독후감이나 반성문을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시를 짓기도 했다. 그 많은 기록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만들었던 수많은 기록들은 버렸거나 삭제했거나 내게 있음에도 찾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초등학생 때 썼던 독후감은 재활용되어 다른 종이가 되었을테고 중학생 때 썼던 소설은 친구가 운영하던 카페에 남아있을 수도 있으나 찾을 수 없다. 인생 계획을 세웠던 글은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으나 내가 그 계획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본 적은 없다. 기록에 대한 경험은 되게 많지만 다시 그 기록을 확인하는 경험은 손에 꼽는다. 대학생 때 배우기로 글쓰기는 독자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행위라고 했다. 심지어 일기도 미래의 내가 독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라지거나 다시 읽히지 않은 기록에 쓰였던 나의 시간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져버린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 생각을 한 번 정리하게 해주고 기록했던 내용을 더 오래 기억에 남게 한다. 가끔은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을 내게서 가져가기도 하고 잊고 지내던 것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물론 후에 누군가에게 읽힘으로써 추가적인 의미를 갖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기록은 스스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기록은 역사를 지닌다. 내가 지금 적는 이 글에는 어릴 적의 일기, 재미 삼아 적었던 소설, 대학교에 와서 제출했던 과제들로부터 형성된 나의 문체가 담겨있다. 그 역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칸으로 된 노트에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로 시작하는 일기 정도만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의 독자가 없더라도 기록은 필자에게 의미 있는 행위임이 분명하고, 그 크기나 방향은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앞으로 주마다 3개의 글을 쓰기로 다짐했고 그 글들이 다시 읽히는 일이 없더라도 내게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오늘부터 적게 될 기록은 내게 있어 변화의 출발이다. 4학년임에도 밥 먹듯이 피씨방에 드나들고,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구매한 전공 책에는 먼지만 쌓이고 있으며, 연이은 무리한 운동으로 인해 몸의 온갖 곳이 아프다. 시간을 붙잡고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한 장씩 뽑아 쓰는 휴지 마냥 하루하루를 버리고 있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빌려와 과거로 쌓이고 과거에 쌓인 시간은 다시 내 미래를 정의한다. 군 전역 후부터 내게 쌓인 시간은 어떤 미래를 만들었을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라온 삶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요즘의 날들과 같지 않길 바라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기록들이 그 간절한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 그게 내 일이 된 후엔 죽어가는 느낌뿐'인 지금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잃어가던 것을 붙잡아낼 수 있길 바란다.

 

'독'  (E-Sens)

시간 지나 먼지 덮인 많은 기억

시간 지나면서 내 몸에 쌓인 독

자유롭고 싶은 게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요즘 난 정확히 반쯤 죽어있어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난 믿은 것

그게 날 이끌던 걸 느낀 적 있지 분명

그 시작을 기억해 나를 썩히던 모든 걸 비워내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지금까지의 긴 여행

꽉 쥔 주먹에 신념이 가진 것의 전부라 말한 시절엔

겁먹고 낡아 버린 모두를 비웃었지

반대로 그들은 날 겁 줬지

나 역시 나중엔 그들같이 변할 거라고 어쩔 수 없이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라던 현실

그는 뛰고 싶어도 앉은 자리가 더 편하대

매번 그렇게 나와 너한테 거짓말을 해

그 담배 같은 위안 땜에 좀먹은 정신

어른이 되야 된다는 말 뒤에 숨겨진 건 최면일 뿐 절대 현명해 지고 있는 게 아냐

안주하는 것뿐 줄에 묶여있는 개마냥

배워가던 게 그런 것들뿐이라서

용기 내는 것만큼 두려운 게 남들 눈이라서

그 꼴들이 지겨워서 그냥 꺼지라 했지

내 믿음이 이끄는 곳 그 곳이 바로 내 집이며 내가 완성되는 곳

기회란 것도 온다면 옆으로 치워놓은 꿈 때문에 텅 빈 껍데기뿐인 너 보단 나에게

마음껏 비웃어도 돼

날 걱정하는 듯 말하며 니 실패를 숨겨도 돼

다치기 싫은 마음뿐인 넌 가만히만 있어

그리고 그걸 상식이라 말하지

비겁함이 약이 되는 세상이지만

난 너 대신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깊은 구멍에 빠진 적 있지

가족과 친구에겐 문제없이 사는 척

뒤섞이던 자기 혐오와 오만

거울에서 조차 날 쳐다보는 눈이 싫었어

열정의 고갈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

그게 내 일이 된 후엔 죽어가는 느낌뿐

다른 건 제대로 느끼지 못해

뒤틀려버린 내 모습 봤지만 난 나를 죽이지 못해

그저 어딘가 먼 데로 가진 걸 다 갖다 버린대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 때는

위로가 될만한 일들을 미친놈같이 뒤지고 지치며

평화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고

불안함 감추기 위해 목소리 높이며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화내며 지껄이고 헤매었네 어지럽게

누가 내 옆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

그 때도 난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망가진 날 믿을 수도 없어 한참을 갈피 못 잡았지

내 의식에 스며든 질기고 지독한 감기

몇 시간을 자던지 개운치 못한 아침

조바심과 압박감이 찌그러트려놓은 젊음

거품, 덫들, 기회 대신 오는 유혹들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멈춰야겠으면 지금 멈춰

우린 중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쳐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뎌지다.  (3) 2024.02.18
탕아  (0) 2024.01.19
노래방  (1) 2023.08.13
7/1 ~ 7/2 (광주)  (0) 2023.07.02
군대의 빗물  (0)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