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빗물
밖에 비가 온다. 해질 무렵에는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이제는 가랑비가 되어 내린다. 그럼 언제부터 비가 온 걸까. 뺨이나 손에 차가운 물방울이 느껴지면 우리는 "어, 비 온다."라고 말한다. 한여름 장마철에 장대비가 떨어져도 비가 오는 것이고 가을 낙엽 위로 이슬비가 떨어져도 비가 오는 것이다.
군대에서 선임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 때는 더 심했어. 우리가 많이 바꾼 거야." 맞는 말일거다. 그들은 선임을 대신해서 세탁기를 돌렸고 우리보다 훨씬 많은 폭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부조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가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조리는 정도에 상관 없이 부조리였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부조리는 당연히 없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심한 일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내 일상의 전부가 침해당하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면 동기와 선임이 있었고 다시 그들 옆에서 잠들었다. 내 공간이라곤 한 칸의 관물대와 관짝 하나보다 작은 크기의 침상이 전부였던 그 때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너무 차가웠다.
자대배치를 받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적은 일기이다. 내리는 빗물을 다시 구름에게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리는 비 아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우산을 쓰는 것 뿐이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선임을 찔렀고 몇 명의 선임은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남은 선임들은 우리를 적대했고 "이게 군대가 맞냐"는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후임이었다.
겨울이 지나가며 우리는 위보다 아래가 많아졌고 엄연한 부대의 실세가 되었다. 몇 명의 동기들은 그 때 선임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다는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땅 위에서 비를 맞는 입장이 아니라 구름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펼쳤던 우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임을 찌른 우리가 후임을 갈구는 건 말이 안 됐고 나는 전역 전날까지 빗속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비에 젖은 장구류를 펼쳐 말리며 군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전역 후에 남아있던 동기들에게서 후임들의 군기가 빠질 대로 빠져서 하루 일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진짜였는지는 모른다. 부대 최고참이 된 동기가 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고 진짜 부대 분위기가 해이해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산을 펼쳤고 그 우산은 다시 접을 수 있는 우산이 아니었으며 이미 외부인이 되버린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후 정말 가끔 그 때의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고민할 때가 있었다.
군대를 나오기 전 나도 후임들 때문에 기분 나쁜 적이 꽤나 있었다. 후임들이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에 나서지 않아서, 내게 자꾸만 선을 넘어서 화가 났다. 그리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우리가 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화를 내지 못했을 때 오히려 나는 이등병 때의 나에게 당당해졌다. 선임들을 찌른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후에 우리가 했던 선택에 책임을 져야했고, 부대 차원에서는 모르겠으나 스스로에게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산이 고장나 비가 샜을 수도 있고 미처 우산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유감이다. 군대는 정말 좁고, 모든 게 부족했고, 피곤했기에 나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까지 쳐줄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우리 때는 더 심했어. 우리가 많이 바꾼 거야."라는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내가 맞았던 비가 그들이 맞을 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까. 그 때의 나는 후회 없을 선택을 했고 그 때로 다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내리던 비가 그쳤다. 파주에 있는 그 군부대에도 지금 비가 내리지 않으면 좋겠다.